데뷔작이라고 하는데 고베대지진을 배경으로 개인의 심리 변화를 다룬 작품이에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재해와 별 도움도 안 되는 정부를 보며 무력한 개인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점이 바탕에 깔려 있어요. 다른 사람의 강렬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주인공 유카리는 봉사활동으로 지진 피해자의 심리 상담을 하게 돼요. 그 과정에서 특히 충격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치히로라는 소녀를 만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상담을 통해 사실 치히로는 다중인격으로 지진의 충격 때문에 '이소라'라는 열세 번째의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졌다는 게 드러나요. 근데 이 인격이 유난히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걱정이 된 유카리는 치히로의 인격 통합을 돕기 위해 나서게 됩니다. 이소라는 일본 전설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인데 간단히 말하면 바람 피운 쓰레기 남편과 정부를 없앤 여자 요괴예요. 근데 영어로 표기할 필요가 있나? 했는데 있더라고요. 역시 작가들은 다 계산해서 쓰나봐요... 아무튼 다중인격은 보통 주 인격이 강한 충격을 받으면 그를 보호하기 위해 나타난다고 하잖아요. 어린 나이에 온갖 고통을 받으며 사회적인 도움을 받지 못한 치히로가 점점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게 넘 안타까웠어요.
사건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변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도 날씨가 생각보다 중요하게 묘사되더라고요. 검은 집에 이어서 또 비! 또 여름! 인데 여기가 데뷔작이니 이쪽이 원조겠죠... 아무튼 후반으로 갈수록 믿음이 중요한 테마로 올라오기 시작해요. 사실 유카리의 능력은 누구보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어질 만한 것이잖아요. 유카리는 능력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믿고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데 그럼 이런 능력이 없는 나는 무엇으로 타인을 믿을 수 있을까? 아니면 무엇으로 타인의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데뷔작에다 초능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라 약간 투박한 면이 있긴 한데 그래도 호러와 사회 문제를 연결하는 부분은 굉장히 감탄스러웠습니다.
천선란 <노랜드>
천선란 <노랜드> 한겨레출판사
천선란 작가는 이전에 <천 개의 파랑>을 재미있게 읽어서 이것도 읽게 되었어요. SF맛 단편집으로 대체로 무언가를 상실할, 혹은 상실한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예요. 상실한 것은 친구이기도 하고, 지구이기도 하고, 문명이기도 하고 다양해요.
예전에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며 내용은 재미있는데 SF라고 하기에는 약하고 청소년 소설이라고 했으면 더 좋아했을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SF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해서 그냥 다양한 소재의 단편 모음집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내용 중엔 '우주를 날아가는 새'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스님을 모시느라 지구를 떠나는 셔틀을 타지 않고 거부한 주인공이 어떤 새와 만나게 되는 내용인데 약간 동화 같은 느낌이에요. 이런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이야기가 취향인가봐요. 또 기억에 남는 건 '제, 재'인데 여기도 두 인격이 한 개의 몸을 공유하지만, 한 인격이 다른 인격을 없애려고 하는 내용이에요.
원래 단편집은 제목으로 쓰이는 이야기를 제일 기대하는 편인데 이건 별로 제 취향이 아니더라고요. 근데 지금 누가 봐도 별 감흥 없이 읽었다는 티가 나네요......
다음 모임 예고
다음 책은 여러 작가의 앤솔로지 책인 <맛있는 여행 추억편>입니다. 옛 추억이 담긴 곳으로 여행을 떠나서 맛있는 걸 먹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저는 이런 테마가 정해진 책을 보면 같이 생각해 보는데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어서 의뢰가 들어와도 책도 못 낼 것 같네요ㅠ 읽어 보면서 좀 더 과거를 떠올려 보려고요. 그럼 다음 모임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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