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지 <시신의 개선>
井上雅彦 외 14인 <屍者の凱旋~異形コレクションLVII~> 光文社
좀비를 테마로 한 망한 사랑 모음집
세스지부터 마키노 오사무까지 열다섯 명의 작가가 좀비를 테마로 쓴 단편 모음집이에요. 정확하게는 '살아있는 시체'가 더 가깝긴 한데 아무튼 작가들이 각자 자신의 개성을 살려 좀비를 재해석한 느낌이에요. 그래서 독특한 작품을 읽은 건 좋은데 원래 좀비하면 슈퍼마켓 파밍과 아지트 개조 아니겠어요? 근데 여기서는 그런 좀비의 습격에 대비한 행동 같은 건 잘 안 나와서 그걸 기대하면 아쉽긴 해요. 그래도 지금까지 읽은 각종 앤솔로지 중에서는 제일 재미있었어요. 그중에 재미있었던 내용을 소개할게요.
히사나가 미키히코 <바람에 날려>
제일 좋았던 작품이에요. 어느 시점부터 죽은 사람이 썩지 않고 풍선처럼 하늘에 뜨게 되면서 고인을 추모하는 방식이 바뀌게 돼요. 바로 묘비에 시신을 고정시켜 두둥실 띄워놓고 바람이 불면 아름답게 보이도록 드레스나 망토 같은 걸 입혀서 휘날리게 하는 거죠. 주인공은 이 묘지를 지키는 묘지기로, 각종 화려하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바람에 휘날리는 시체들과 하는 일이라고는 시체가 잘 고정되었는지 확인하는 것과 가끔 시체를 훔치러 오는 사람을 쫓아내는 일이 다인 조용한 묘지기가 대비되면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인상적입니다. 근데 시체 중엔 생전에 자주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있어서 제목대로 밥 딜런의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 시체가 있어요. 사실 세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혼란스러운데 묘지만 고요함을 유지하다가 국가가 본격적으로 시체를 이용하기로 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해요. 설정부터 몽환적인 분위기, 결말까지 정말 모든 게 완벽한 작품이었습니다.
우쓰기 슌쇼 <ES 프래그먼트>
일단 구성이 독특한 작품이에요. 어느 순간 좀비가 창궐하는데 인류는 백신으로 이 증상을 완화하는 것에는 성공합니다. 죽어서 좀비가 되는 건 피할 수 없지만, 백신을 맞으면 폭력성이 사라져 그냥 거리를 배회하기만 하는 거예요. 주인공은 고스로리 패션으로 이름이 조금 알려진 모델로 좀비가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구성이 왜 독특하냐면 주석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본편에는 "지금 입은 옷은 ~~이다"(주: 솔직히 이거 좋아하는 브랜드도 아닌데 꼭 입어달라고 해서 굳이 입었더니 설마 인생 최후의 옷이 이거?) 이런 식으로 마치 서술자가 별개로 있는 것처럼 주석이 달려 있거든요. 이게 변하는 재미는 진짜 직접 봐야 아는데ㅠ0ㅠ 심지어 이거 장르가 백합임..!! 이 세계는 배회하는 좀비용으로 몸에 칩을 넣어서 확인하면 반려동물처럼 보호자 정보가 떠서 가족에게 인도하게 되어 있거든요. 근데 주인공은 가족이 없어서 의자매처럼 서로 거둬주기로 약속한 여자애가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거리를 배회해도 여자애는 오질 않고... 하는 이야기예요. 이것도 역시 결말까지 좋았어요.
오리가미 교야 <허니문>
좀비 사태가 한차례 쓸고 지나간 뒤, 사람들이 떠나 적막해진 동네에 남아 조용히 살고 있던 소년이 어느 날 몸이 토막나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뉜 채 좀비가 된 소꿉친구 소녀를 줍게 됩니다. 뇌가 있는 상반신은 아직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어서 그 좋아하는 소녀를 데려와 둘만의 세상을 즐기는 이야기예요. 상반신만 남으니 무겁지 않게 들 수 있고 가방에도 들어가니 쏙 너무 좋다^^ 하는 순애()물이에요. 세상에 여주 완전 포켓걸임. 아무튼 세상이 안정화되어 언젠가 동네에도 사람들이 돌아올 것을 아쉬워하는 그 모습이 좋았고요. 그 기간 동안 둘만의 시간을 보낼 거라 제목이 허니문인 것 같아요. 사실 소녀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관계인 것도 좋았어요. 결말쯤에 나온 모습을 보면 쌍방인 것도 같아서 상반신만 있어도 뭐.. 뭐... 서로 좋다면 괜찮은 것 아닐지? 저 사실 소꿉친구물 좋아하는데 원래 로맨스에서 소꿉친구는 필패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잖아요. 소꿉친구는 패배하지 않는다구...!!
사이토 다이치 <콜 카다브르>
불의의 사고로 어린 딸을 잃은 부부에게 어떤 세일즈맨이 찾아와서 영원히 살아있는 시체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해요. 갑작스러운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부부는 그의 말에 따라 몸에 흐르는 피를 세일즈맨이 영업한 회사의 것으로 바꾸게 되고, 그 뒤로 딸은 생전과 같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움직이기만 할 뿐이지 감정적 교류 같은 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엄마는 어떤 날은 딸을 위한 옷이며 장난감을 사왔다가 또 어떤 날은 저런 건 내 딸이 아니라며 난동을 부리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요. 그러다 결국 엄마는 딸을 죽이고 본인도 자살하고 맙니다. 그 모습에 아빠는 죽음 자체에 공포를 느끼게 되는데... 하는 이야기예요. 장르로 따지자면 좀비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하는 장치가 곳곳에 담겨 있어서 통제된 디스토피아 사회 이런 장르를 좋아한다? 그럼 추천할게요. 물론 저도 좋아하는 장르라 결말까지 읽고 넘 만족했어요.
샤센도 유키 <육령지>
어느 순간 세상에 고기 나무가 숲을 이룰 만큼 울창하게 자라고 그 나무에선 열매 대신 장기()가 열리는 돌아버린 설정으로 시작되는 작품이에요. 인류는 처음엔 당연히 당황하지만, 나무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장기로 어느새 전 인류의 장기 수술을 책임질 만큼 유용하게 쓰게 됩니다. 이것으로 나무의 원산지인 일본은 큰 번영을 누리게 돼요. 주인공은 이 나무를 돌보는 사람으로 그의 동생 역시 얼마 전 장기 열매로 폐 이식을 받아 건강해졌으니 정말 복받은 인생이 아닐 수 없어요. 그리고 밝혀지는 나무의 정체란... 하는 이야기예요. 내용이 진행될수록 과거로 가는 형식으로 결말까지 읽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예요. 설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중간에 나무 열매로 생긴 머리()에 빠져든 남자의 이야기가 좋더라고요. 근데 앞에서 상반신 연애를 읽고 왔더니 약간 광기가 모자란 느낌이라 그게 좀 아쉬웠어요. 사실 그 부분은 여기서 크게 중요한 부분도 아니라 어쩔 수 없긴 한데 아무튼.
사와무라 이치 <좀비로 착각하다>
좀비와 사회 문제를 결합한 사회파 좀비(?) 소설이에요. 여긴 반갑게도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을 해치는 좀비로 시작하는데 곧 진압되어 이제는 가끔씩 나타나는 존재가 된 상태예요. 그런데 문제는 좀비가 창궐하여 일반인도 필요에 따라 좀비를 공격해도 되는 분위기 자체는 남아 있다는 거죠. 사람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고 흉한 몰골이라면 '좀비로 착각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소년은 이런 논리로 나이가 들어 거동하기 힘든 노인을 '좀비'라는 이유로 아빠와 그 친구들이 살해하는 것을 목격하게 돼요. 그리고 소년은 친하게 지낸 남매의 여동생에게 오빠가 히키코모리가 되어 폭력적이 되었다며 좀비로 착각되었으면 좋겠다는 상담을 받고 이 이야기를 다시 아빠에게 전달하며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게 됩니다. 노인, 노숙자, 장애인처럼 사회에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좀비라는 명목으로 제거하는 모습과 진짜 사람을 해치는 좀비 가운데 누가 더 문제일지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인데 일단 좀비 묘사 자체가 제일 익숙한 그것이라 좋았어요.
기타 작품
그 외에 미쓰다 신조의 작품은 무섭긴 진짜 무서웠는데 뭔가 취향과는 안 맞았고 세스지의 게임 버그와 좀비를 연결한 작품은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게임 설명을 너무 길게 해서 그뭔씹 느낌;; 우에다 사유리의 좀비는 약간 망한 사랑+디폴트 좀비+일상 파밍 느낌이라 설정이 넘 좋았는데 이쪽은 장편으로 보고 싶은 느낌이었고, 마찬가지로 마키노 오사무의 글도 설정이 방대해서 장편이 더 나을 것 같더라고요. 둘 다 덕후의 심장을 뛰게 하는 설정인데 단편으로 보니 족굼 아쉬움. 나머지도 글은 좋은데 다 쓰기엔 너무 힘들고요. 좀 힘들었던 건 에로틱 그로테스크 장르였던 글이 있는데 시간이라니 너무.. 너무... 더럽지만 구성은 또 재미있었는데 구더기를 진주처럼 영롱하게 묘사하는 거 앍 너무 재능을 이상한 곳에 낭비하고 있는 것 아닌지;; 아무튼 위에 쓴 것처럼 오랜만에 앤솔로지로 만족해서 자잘한 불만은 넘기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