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메노 가오루코 <그 여자애는 머리가 나쁘니까>
최고의 저혈압 치료제
도쿄대생 다섯 명에게 강제 추행을 당한 여성이 오히려 꽃뱀이라느니, 감히 도쿄대생과 같은 수준이라 생각했냐는 둥 온갖 욕을 먹는 걸로 시작하는 페미니즘 소설이에요. 2016년에 실제로 도쿄대생 여럿에 의한 성범죄 이후 마찬가지로 가해자를 도쿄대생으로 만들고 그런 범죄가 일어나기까지의 사회 구조를 묘사하여 사회에 뿌리 박힌 성차별부터 학벌, 계층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피해자인 미사키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근데 자세히 보면 장녀로 태어난 미사키는 장녀라는 이유로 동생들 뒤치닥거리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솔선해서 도와야 하고, 엄마 감쓰 역할도 해줘야 해요. 여자는 굳이 대학까지 가서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미사키가 들어간 대학은 결혼하기에도 좋고 집에서도 가까워서 진학을 허락받은 그런 환경이지만 그래도 가족끼리 사랑은 있는 그런 평범함이에요.
가해자 다섯 명 중 하나인 쓰카사는 괜찮은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프로토 타입인 형이 고생하는 걸 보고 요령 있게 도쿄대에 진학한 머리는 좋은 남자고요. 그런데 자신의 주변에 다가오는 모든 여자는 다 '도쿄대생인 나를 노리고 접근한 꿍꿍이가 있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어요. 과외 학생의 엄마가 조금 예쁘게 차려 입어도 도쿄대생인 나와 어떻게 해보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고, 다른 학교로 진학한 고등학교 동창이 말을 걸어도 도쿄대생인 나와 만나고 싶어서 저러는 어떻게 보면 인생 참 편하게 사는 타입이에요. 하지만 이런 편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건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과 명문대생이라는 '스펙'을 모두 갖추며 자연스럽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차별해도 되는 사회 분위기 덕분이겠죠.
쓰카사는 비슷하게 집안 환경도 괜찮고 똑같이 도쿄대생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네 친구를 만나서 동아리를 만듭니다. 명목은 도쿄대 주변의 다른 대학과 합동으로 교류하며 활동하자는 것인데 실상은 분명 이렇게 건전한 동아리를 만들면 도쿄대생을 노리는 호구 같은 여자들이 접근할 테니 그 여자들 사진과 동영상 좀 찍어서 용돈도 벌고 예쁜 애면 귀여워하며 놀아주자^^ 라는 목적으로 만든 거예요. 하 진짜 쓰레기 같다... 그 와중에 같은 도쿄대생 여자는 배제한다는 점이 더욱 쓰레기 같고요.
미사키는 비어 페스티벌에서 불행하게도 이런 쓰카사와 만나고 마는데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알고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잖아요? 처음엔 나름 풋풋하게 만났는데 그 끝이 집단 강제 추행일 걸 생각하니 두 사람이 만난 순간 패드 던졌잖아요(그래도 내 아이패드는 소중하니까 베개 위에 살짝 던짐). 근데 이 소설의 절묘한 점은 집단 성폭행이 아니라 추행이라는 거예요. 미사키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질 만한 일을 당했는데 남이 보기에는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삼류 대학생 여자애 그냥 좀 만졌을 뿐인데 일부러 앞길 창창한 도쿄대생의 인생을 망치려고 오버한다'가 되는 거죠.
아무도 반성하는 사람도 없고 피해자만 있는 이야기라 의도적으로 피하고 안 읽는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저는 읽긴 잘한 것 같아요. 우리도 명문대생이 저지른 범죄에 장래가 어쩌고 하며 처벌이 약한 걸 종종 보고 있는 만큼 우리와 그렇게 거리가 먼 이야기도 아니고, 그 범죄가 일어나기까지 빌드업하는 과정은 차별적인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 많더라고요. 아무튼 특히 저혈압 있으신 분에게 추천하고요 저처럼 안구 건조증 있는 분도 바로 나을 수 있습니다^^)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