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하시 나호코 <내일은 어딘가의 하늘 아래>
문학 소녀가 판타지 작가가 되기까지
2013~2014년에 잡지에 연재한 에세이를 모은 책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영국에 갔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세계를 여행하고, 특히 대학 때 연구하던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어보리진)과 교류하며 느낀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이 작가의 책으로는 전에 뉴스레터로도 발송했던 <향군>이 있는데, 에세이를 읽으니 그 소설의 분위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조금 알 것 같더라고요.
존댓말로 쓰여 있어서 전체적으로 정중하고 따뜻한 감성의 글이라 읽기도 편하고 주로 나오는 호주부터 영국, 이탈리아, 이란 등등 다양한 나라가 나와서 책만 읽어도 최소한 유럽은 여행할 수 있는 느낌이에요. 나라의 특징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보다는 본인이 그 나라에서 겪은 사소한 에피소드 위주라 진짜 찐 여행 에세이를 원하는 사람보다는 작가에 대한 기본 지식이 좀 있는 사람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영국 아동문학을 좋아해서 영국에 갔을 때 영어를 잘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작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직접 만나게 된 일화라든가, <반지의 제왕>을 언급하며 맛있는 음식과 식사의 소중함을 말한다든가 하는 식이라 작가가 어떤 책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는지 그대로 알 수 있어서 저도 아는 책이 나오면 반갑고 그렇더라고요. 위에 쓴 <반지의 제왕> 얘기도 영화 보신 분은 그거 아시죠, 점점 반지의 지배를 받아서 쌤이 막 먹는 얘기하니까 프로도가 생각 안 난다고 하는 그 장면. 아니 호빗이 음식을 모른다고 하다니ㅠ0ㅠ 하면서 저절로 눈물이 나는 그 얘기가 책에 나와서 '후.. 이분 뭘 좀 아시네' 하게 건방지게 평가했고요ㅋㅋㅋㅋㅋ
그리고 문장의 특징이 되게 사소한 찰나를 엄청 몽환적으로 기억하고 묘사하더라고요. 첫 에피소드에 영국에서 길을 잃었는데 지나가던 수녀님에게 못하는 영어로 어떻게든 설명하니까 호텔로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그 수녀님의 옷자락이 휘날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그 외에도 접시에 수북하게 담긴 라즈베리의 색깔이라든가 어두운 밤에 외부 화장실 빛만 의지하고 걸어가다 반대편으로 돌아선 순간 그 깜깜한 광경에 대한 묘사 같은 게 사실 여행하는 과정 중에서는 진짜 사소한 일인데 그걸 문장으로 읽으니까 내 인생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약간 티엠아인데 저도 낯선 오빠가 호쾌하게 길을 열어주고 떠난 경험이 있지만 책을 읽은 그 순간까지 기억하지 못했고 대신 그날 먹은 보성 녹돈의 맛은 기억하고 있었읍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인적으론 작가가 어머니와 여행한 에피소드가 재미있었어요. 옛날 분인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엄청난 모험심을 발휘해서 도전하고 즐기는 모습도 좋고, 가끔 보여주는 엉뚱한 행동도 작가와 비슷해서 판타지 장르를 쓰게 된 밑바탕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어서 좀 더 친근감이 들더라고요. 그 와중에 여행하며 고생한 일도 언젠가 글로 쓸 수 있으니 잘 기억해둬야지 하는 게 너무 작가다운 모습이라 소설가가 쓴 에세이를 원하는 분이면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서 또 티엠아 하나 더 공개하자면 지하철에서 읽다가 어머니가 대상포진 걸린 얘기가 나오는데 우리 엄마가 걸렸던 거 생각나서 얼른 소라게 스타일로 모자 내리고 눈물 흘림 흑흑ㅠ0ㅠ |